카테고리 없음

숫자는 정직하지 않았다

Sales Excellence Advisory 2026. 9. 18. 11:44


지정학적 리스크가 공급망 전체를 흔들던 시기, 나는 사업본부장으로서 매주 파이프라인 리뷰를 챙겼다. 첫 몇 달은 숫자가 나쁘지 않았다. 오히려 위안이 될 정도였다. 분기 목표를 채우고도 남을 규모의 딜(Deal)들이 예보 시트 위에 가지런히 줄지어 있었고, 담당자들의 보고는 한결같이 자신감에 차 있었다. "아마도 이번 달엔 될 것 같습니다." 나는 그 말을 몇 주째 듣고 있다는 사실을 뒤늦게 알아챘다.
문제는 그 딜 중 하나였다. 규모가 큰 만큼 조직 전체가 그 한 건에 기대를 걸고 있었다. 담당 팀장은 매 리뷰마다 "거의 다 됐다"고 보고했고, 나 역시 처음 몇 번은 그 말을 그대로 믿었다. 그런데 이상했다. '거의 다 됐다'는 말이 세 번째 리뷰에서도, 다섯 번째 리뷰에서도 똑같이 반복됐다. 진행 단계는 바뀌지 않은 채 확률만 슬금슬금 올라가고 있었다. 그건 진척이 아니라 희망고문이었다.
결국 그 딜은 무산됐다. 고객사 내부 결재 라인이 아예 다른 벤더로 기울어 있었다는 사실을, 계약 직전에야 알게 됐다. 팀장은 몰랐던 게 아니라, 알고 싶지 않았던 것에 가까웠다. 나쁜 소식을 먼저 꺼내는 사람이 되고 싶지 않았을 뿐이다. 그 조직에서는 오랫동안 그래 왔다. 낙관적인 숫자를 보고하는 사람이 유능해 보였고, 냉정한 숫자를 보고하는 사람은 의욕 없는 사람 취급을 받았다.
이 사건 이후 내가 손댄 건 담당 팀장의 역량이 아니었다. 조직이 숫자를 다루는 방식 자체였다. 매 딜마다 '진행 단계'와 '확률'을 담당자의 감이 아니라, 결재선 확인 여부·예산 확보 여부·경쟁사 배제 여부 같은 객관적 체크포인트에 연동시켰다. 체크포인트를 통과하지 못하면 확률은 자동으로 낮게 잡혔다. 담당자의 의지나 관계의 깊이는 더 이상 숫자에 반영되지 않았다. 처음엔 다들 답답해했다. 자신만만하던 딜들이 시스템 앞에서 줄줄이 확률이 깎였으니까. 그러나 몇 개월 지나자 예측치와 실제 결과의 간극이 눈에 띄게 줄어들었다. 나쁜 소식들이 더 빨리, 더 자주 올라오기 시작했고, 아쉽지만 이제서야 진짜 현실을 볼 수 있었다.
희망은 파이프라인이 아니다. 파이프라인은 검증된 사실의 축적이어야 한다. 이 원칙 하나를 조직에 심는 데 거의 반년이 걸렸지만, 그 반년이 지나고부터 나는 리뷰 시간에 팀장들의 표정보다 체크포인트의 통과 여부를 먼저 보게 됐다. 표정은 속일 수 있겠지만 체크리스트는 거짓말을 하지 않는다.

 


지난 글에서 세 번의 위기를 겪으며 감이 아니라 시스템으로 움직이는 조직만이 살아남았다고 썼다. 이 에피소드가 그 문장의 구체적인 얼굴이다. 시스템은 거창한 이론에서 출발하지 않았다. 무산된 딜 하나, 반복된 "거의 다 됐다"는 보고, 그리고 그걸 더는 믿지 않기로 한 결정에서 출발했다.
다음 글에서는 이런 질문을 다뤄본다. "숫자를 이렇게 냉정하게 관리하면 영업 조직의 사기가 떨어지지 않나요?" 실무자들이 가장 자주 던지는 질문이고, 나 역시 답을 찾는 데 시간이 걸렸던 질문이다.
---
TENET SALES — 지속 가능한 성장을 위한 세일즈 엑설런스